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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받고 싶을 때100

호랑이 호랑이 - 이재용 지난 밤에 보았다고 어머니는 말했지 차가운 공기가 스며드는 겨울 밤하늘 아래 동굴을 뛰쳐나와 밤을 휘젓고 다니는 불빛을 내뿜고 있는 거대한 호랑이 한 마리를 근육질의 몸 주황색의 털 사이 사이로 계곡의 물이 검게 흘러내리고 어둠을 헤치며 두 눈에 흘러나오는 안광 한 번 울기만 하면 산천을 떨게 할 압도적인 커다란 입을 벌리기도 했지만 다행히 우리는 깨지 않았다고 말했지 우리가 숨죽이며 침묵할 때 어머니는 말했지 호랑이처럼 살 수 있다면 단 하루라도 호랑이처럼 살 수 있다면 평생에 단 한번이라도 저렇게 포효하며 살 수 있다면 동굴에서 뛰쳐나와 인간이 되지 않은 호랑이는 참 잘한 것이라며 지난 밤에 보았다고 어머니는 말했지 동굴을 뛰쳐나와 밤을 휘젓고 다니는 괴롭더라도, 힘들더라도, 홀로 .. 2022. 1. 5.
호랑이-보르헤스 또 다른 호랑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나는 한 마리 호랑이를 사유한다. 어스름이 광대무변의 분주한 도서관을 예찬하고 서가를 아득하게 하는 듯하네. 힘차게, 천진스럽게, 피범벅으로, 새롭게 호랑이가 그의 밀림과 아침을 어슬렁거리고 있으리. 이름 모를 강가 진흙벌에 자욱을 남기고. (그의 세계는 이름도, 과거도, 미래도 없고, 다만 어떤 찰나만이 있을 뿐이네.) 야만적 거리를 도약하리. 난마 같은 냄새의 미로에서 여명의 내음과 열락의 사슴 내음을 찾아다니리. 나는 대나무 무늬 사이로 그의 줄무늬를 해독하고 전율이 감도는 휘황찬란한 호피에 감싸인 골격을 짐작하네. 지표면의 둥근 바다와 사막은 헛되이 가로막고 있을 뿐이지. 머언 남아메리카 하구의 집에서부터 내가 너를 쫓고 꿈꾸거늘. 아! 갠지스 강변의 호랑.. 2022. 1. 5.
경유지에서-채윤희 경유지에서 채윤희/ 202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중국 부채를 유럽 박물관에서 본다 초록색을 좋아하는 나는 딱정벌레 날개 위에 누워 있다 한때 공작부인의 소유였다는 황금색 부채 예수는 얼핏 부처의 형상을 하고 있다 약속의 땅은 그림 한 뼘 물가로 사람을 인도한다는 뿔 달린 짐승은 없다 한 끝이 접혔다가 다시 펼쳐진다 떨어진 금박은 지난 세기 속에 고여 있고 사탕껍질이 바스락거린다 잇새로 빠져나와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받아 적을 수 없는 소리 파란색을 좋아하는 나는 물총새 깃털을 덮고 잠든다 멸종에 임박한 이유는 오직 아름답기 때문 핀셋이 나를 들어올리고 길이 든 가위가 살을 북, 찢으며 들어간다 기원에 대한 해설은 유추 가능한 외국어로 쓰여 있다 따옴표 속 고어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오랜 세월 파랑.. 2022. 1. 3.
세 가지를 기억해둬 춤을 추고 있을 때는, 규칙을 깨도 돼. 규칙을 깨는 게 가끔은 규칙을 확장하는 거지. 규칙이 없을 때도 가끔 있어. - 메리 올리버 As long as you're dancing, you can break the rules. Sometimes breaking the rules is just extending the rules. Sometimes there are no rules. -Mary Oliver - 제주도 새미은총의 동산에서 2022. 1.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