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받고 싶을 때106 경유지에서-채윤희 경유지에서 채윤희/ 202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중국 부채를 유럽 박물관에서 본다 초록색을 좋아하는 나는 딱정벌레 날개 위에 누워 있다 한때 공작부인의 소유였다는 황금색 부채 예수는 얼핏 부처의 형상을 하고 있다 약속의 땅은 그림 한 뼘 물가로 사람을 인도한다는 뿔 달린 짐승은 없다 한 끝이 접혔다가 다시 펼쳐진다 떨어진 금박은 지난 세기 속에 고여 있고 사탕껍질이 바스락거린다 잇새로 빠져나와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받아 적을 수 없는 소리 파란색을 좋아하는 나는 물총새 깃털을 덮고 잠든다 멸종에 임박한 이유는 오직 아름답기 때문 핀셋이 나를 들어올리고 길이 든 가위가 살을 북, 찢으며 들어간다 기원에 대한 해설은 유추 가능한 외국어로 쓰여 있다 따옴표 속 고어는 이해하지 못하지만 오랜 세월 파랑.. 2022. 1. 3. 세 가지를 기억해둬 춤을 추고 있을 때는, 규칙을 깨도 돼. 규칙을 깨는 게 가끔은 규칙을 확장하는 거지. 규칙이 없을 때도 가끔 있어. - 메리 올리버 As long as you're dancing, you can break the rules. Sometimes breaking the rules is just extending the rules. Sometimes there are no rules. -Mary Oliver - 제주도 새미은총의 동산에서 2022. 1. 2. 새 달력 첫날 깨끗하구나 얼려서 소독하는 겨울 산천 너무 크고 추웠던 어릴 적 예배당 같은 세상에 새 달력 첫날 오직 숙연하다 천지간 눈물나는 추위의 겨울 음악 울리느니 얼음물에 몸 담그어 일하는 겨울 나룻배와 수정 화살을 거슬러 오르는 겨울 등반대의 노래이리라 추운 날씨 모든 날에 추운 날씨 한평생에도 꿈꾸며 길가는 사람 나는 되고 지노니 불빛 있는 인가와 그곳에서 만날 친구들을 꿈꾸며 걷는 이 나는 되고 지노니 새 달력 첫날 이것 아니고는 살아내지 못할 사랑과 인내, 먼 소망의 서원을 시린 두 손으로 이 날에 바친다 ―김남조(1927∼) 포항시 앞바다의 2022년 1월 1일 일출 오전 7시 33분 2022. 1. 1. 시간에 대하여 간다 간다 나는 간다. 기다리고 기다렸건만 지난 1월의 미래는 가버렸다. 꽃이 피기도 전에 꽃은 저 버리고 가장 화려하다는 순간이 지나간 것도 모른 채 사랑은 끝나버리고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은밀한 사랑의 아름다움은 다음에 더한 절정이 있을 줄 알았건만 지나가고 보니 그 순간이 절정이었어 불꽃처럼 타오르다가 태초의 그 생명 속으로 빨려 들어가 시간을 정지시켜 놓은 채 사랑하고 싶었어 재가 되도록 재가 되어 허공 속으로 날아가고 싶었어 간다 간다 나는 간다 기다리고 기다렸건만 12월에 가서 모든 것은 과거가 되어 버리고 나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는 데 모든 사랑은 끝나 버렸어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죽은 뒤에도 다시 타오르는 계절 또 다시 꽃피는 날이 봄이 돌아올지니 내 마음에 등불 하나 다시 켜져 다시 사.. 2021. 12. 30. 이전 1 ··· 22 23 24 25 26 2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