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위로받고 싶을 때

순간-비스와바 쉼보르스카

by marrige 2022. 1. 9.

마라도

                 

순간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초록빛으로 물든 언덕길을 오른다.

풀밭, 그 풀밭 위 작은 꽃들,

그림책 삽화에서 본 듯한 풍경.

안개 낀 하늘엔 어느새 푸른 기운이 감돌고

저 멀리 또 다른 봉우리가 적막 속에 펼쳐진다.

 

고생계도 중생계도 애초에 없었던 듯

스스로를 향해 포효하는 바위도,

심연의 융기도 없었던 듯.

번쩍이는 섬광 속엔 밤이 없고,

어둠의 실타래 속엔 낮이 없다.

 

뜨거운 열병 속에서도

얼음장 같은 오한 속에서도

아직 평원은 여기까지 떠밀려오지 않은 듯.

 

바다가 소용돌이치고 해안선이 산산조각 나는 것도

어딘가 다른 곳의 일인 듯.

 

현지 시각 9시 30분.

모든 것은 약속대로 정중하게 그 자리에 놓여 있다.

골짜기의 시냇물의 모습으로 한결같이.

오솔길은 오솔길의 모양으로 언제나 그렇게.

숲은 숲의 형상을 갖추고 영원히 그 자리에.

그 위를 나는 새들은 나는 새의 역할에 충실하게.

 

시선이 닿는 저 너머까지

이곳을 송두리째 지배하는 건 찰나의 순간.

지속되기를 모두가 염원하는

지상의 무수한 순간 중 하나.  

 

                   (번역: 최성은)

 

'위로받고 싶을 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모-김소월  (0) 2022.01.10
옛이야기-김소월  (0) 2022.01.10
당신의 아름다움- 조용미  (0) 2022.01.09
청산은 나를 보고  (0) 2022.01.08
매화-한광구  (0) 2022.0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