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청령포는 조선 제6대 왕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15살의 어린 나이에 상왕으로 물러 앉았다가, 1456년 사육신의 단종 복위 움직임이 있은 다음 해인 1457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유배생활을 한 곳이다.
맑을 淸(청), 물 맑을 泠(령), 물가 浦(포)의 청령포(명승 제50호). 단종 애사를 안고 있는 이곳은 비운의 역사와는 달리 물이 맑고 풍광이 수려하다. 청령포는 동·북·서쪽의 3면은 서강(西江)이 굽이쳐 흐르고 있고, 태백선이 지나가는 남쪽 한 면 만 칼처럼 날카로운 산에 연결되어 있다. 몹시 험준한 바위가 겹겹으로 쌓인 이곳은 섬이나 다름없다.
단종을 알현하는 모습- 단종은 1448년(세종 30) 8세의 나이로 왕세손에 책봉되었는데, 세종은 이때 "원손(元孫) 이홍위는 천자(天資)가 숙성하고 품성(稟性)이 영특하고 밝은데, 지금 나이가 스승에게 나갈 만큼 되었으므로 너를 명해 왕세손을 삼는다."라고 하였다. 1452년(문종 2) 5월에 문종이 죽으면서 왕위에 올랐는 데, 단종의 나이 불과 12세 때였다.
그는 짧은 재위 기간 중에도 <고려사>를 비롯한 다수의 서책을 반포했다. 즉위한 얼마 뒤, 1453년 세종의 둘째 아들이자, 그의 작은 아버지인 숙부 수양대군이 군국의 모든 권리를 장악하면서, 단종은 이름뿐인 왕이 되었다. 1455년 한명회 등의 강요에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가, 1457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
1453년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통해 정권·병권을 장악했다. 이때 성삼문·정인지·박팽년 등 43명이 정난공신의 칭호를 받았고, 그는 왕위에 올랐다. 세조가 왕의 전제권을 확립하려 하자 집현전 출신의 유신들은 반발했다. 일부 유신들은 세조를 몰아내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도모하였다.
이들은 1456년 6월 창덕궁에서 명의 사신을 맞이하는 자리를 이용하여 세조를 살해할 계획이었으나 연회 절차에 변동이 생기면서 거사가 미루어지게 되었다. 이때 불안을 느낀 김질이 밀고해 세조는 이들을 잡아들였고, 주모자 6명( 사육신-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은 모두 처형당했다.
볼 관(觀), 소리 음(音)의 관음송(觀音松). 단종이 유배 온 것을 보고, 오열하는 소리를 들은 소나무라 해서 관음송이라 한다. 단종은 유배 당시 수령 60년으로 추정되는 이 소나무의 갈라진 가지 사이에 걸터앉아 시름을 달래었다고 한다.
영조 2년(1726) 단종이 죽은 지 270년 뒤에 세워진 이 금표비는 '동서로 300척 남북으로 490척은 왕이 계시던 곳이므로 뭇사람은 들어오지 말라'는 출입금지 푯말인데, 단종이 금표비에 표시된 만큼 행동에 공간적 제약을 받은 것으로 상상된다.
청령포를 나와 장릉으로 이동하여 본다. 장릉에 있는 단종 역사관- 단종의 일대기와 당시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단종역사관을 지나 단종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가 본다.
충신 엄홍도의 정여각. 단종은 사약을 마시고 죽은 뒤 강물에 버려졌는데 이를 거둔 이가 영월 호장 엄홍도다. 그는 단종의 시신을 거두면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에도 몰래 시신을 수습해 자신의 조상묘 46기가 조성된 곳에 단종의 묘를 몰래 만들어 숨겨 놓았다.
신도(神道)와 어도(御道) -
단종이 명예를 회복하는 데는 200년이 넘게 걸렸다. 숙종 7년(1681), 숙종은 그를 노산대군으로 추봉한 뒤 숙종 24(1698) 정식으로 복위했고, 묘호를 단종으로 종묘에 부묘했으며 능호를 장릉이라 했다. 장릉의 능침은 양지바른 곳에 있어 눈이 와도 쉽게 녹으며 따뜻하다. 능침을 둘러싼 소나무가 모두 봉분을 항해 절을 하듯 묘하게 틀어져 있다.
단종애사를 담은 영월 청령포와 장릉은 그 수려한 경관과 역사 이야기로 누구나 한 번은 둘러보고 싶은 관광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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