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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받고 싶을 때

기형도, 진눈깨비

by marrige 2022. 2. 14.

지리산

      진눈깨비

                                 기형도 

 

때마침 진눈깨비 흩날린다.
코트 주머니 속에는 딱딱한 손이 들어 있다.
저 눈발은 내가 모르는 거리를 저벅거리며
여태꼇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들과 건물들 사이를 헤맬 것이다.
눈길 위로 사각의 서류 봉투가 떨어진다, 허리를 나는 굽히다 말고
생각한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참 많은 각오를 했었다.
내린다 진눈깨비, 놀랄 것 없다, 변덕이 심한 다리여
이런 귀가길은 어떤 소설에선가 읽은 적이 있다.
구두 밑창으로 여러 번 불러낸 추억들이 밟히고
어두운 골목길엔 불켜진 빈 트럭이 정거해 있다.
취한 사내들이 쓰러진다, 생각난다 진눈깨비 뿌리던 날
하루종일 버스를 탔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낡고 흰 담벼락 근처에 모여 사람들이 눈을 턴다.
진눈깨비 쏟아진다,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나는 불행하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나는 일생 몫의 경험을 다 했다, 진눈깨비 

 

 * 기형도. 인천 옹진 출생.

 구체적 이미지들을 통해 우울한 자신의

 과거 체험과 추상적 관념들을 독특하게 표현한 시인.

 유고 시집'입속의 검은 잎'(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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